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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8 '괴물'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로 '당신'! 3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치이야기는 딴 데 가서 하라, 난 정치에 관심이 없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한번 그이를 돌아본다.

그렇게 되어버린 원인이야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시선을 감출 수는 없다.

정치는 곧 우리 생활이다.

홍세화의 새 책 생각의 좌표 를 소개하는 기사 제목이 유난히 와 닿는다.

링크를 걸려다가, 글 전체를 옮겨본다.

20대에 반(反)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태인 학자 프리모 레비는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괴물보다 위험한 것은, 바로 '기계적' 인간들. 프레모 레비가 이들을 '위험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들이 결코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폭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독재자의 폭압적인 통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독재자의 폭력에 '침묵'했던 대다수의 독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용산에서 철거민 다섯이 목숨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처음엔 분노를, 그 다음엔 동정을, 그 다음엔 망각을 선택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책 제목을 잠깐 빌리자면, '잔인한 국가'와 '외면하는 대중'이 기가 막히게 호흡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기획위원 홍세화가 6년 만에 새 책을 펴냈다. 그의 책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 펴냄)는 '외면하는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 틀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는 책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게 당신 것이 되었는가, 라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홍세화에 따르면, 사람은 때로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사람들의 생각은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으며, 웬만한 내적 결단과 용기 없이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 <생각의 좌표>(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그런데 그 생각들이 개인의 부단한 성찰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제도 교육과 사회가 던져준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내 생각의 '주인'이 아니라, 남들이 뿌려놓은 생각의 '노예'가 된다. 따라서 저자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홍세화는 이 질문을 적극적으로 던질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지배 세력이 주입하는 생각들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 이 질문에는 이미 '생각의 노예'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쓸쓸한 시선 또한 담겨 있다.

'당신의 (지불) 능력을 보여주세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선동에 사람들은 동화할 뿐 아니라 선망하고, 학생들은 줄 세우기식 교육을 통해 이따금 인권 의식을 '배우(學)'지만, 일상에서는 오히려 인권 침해를 '익힌다(習)'. 물신 지배의 논리에 우리가 무방비로 포섭돼 있는 '생각의 노예'임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왜 비판하지 않고 선망하게 되었나?

문제는 이 과정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해고를 당하기 전까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싸움은 '노력하지 않은 자'들의 밥그릇 싸움이다. 갑작스런 재개발로 턱도 없는 보상비를 받고 쫓겨나기 전까지는, 용산 참사 희생자들에게 '몇 푼 더 받으려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 정도의 시선을 던질 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이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거슬러 의식을 형성하는 사람들.

이러한 의식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 가능성과 무관한 주술에 의식을 맡겨 놓고, 현재의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꿈꾸는 미래의 모습에 자신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1퍼센트'나 '부자 아빠'라는 미래에 대한 선망이 자신의 존재를 압도한다.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로

"내가 유전자를 신뢰하는 데 비해, 그는 교육과 환경을 신뢰한다. 내가 자신과 남을 싸잡아 불신하는 데 비해, 그는 남과 자신을 동시에 신뢰한다. 우애, 연대 같은 말이 내게는 관념인 데 비해, 그에게는 구체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를 가장 먼저 국내에 소개한 고종석이 자신의 책 속에서 그를 평가한 대목이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지만, 망명객의 신분을 벗고 한국에 돌아온 홍세화는 크게 달리진 점이 없다. 여전히 교육과 환경을 중요성을 신뢰하며,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주장한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상위 1퍼센트로 달려가는 사회. 그럼에도 저자는 '사회적 약자가 연대하는' 사회를 끈질기게 희망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책을 썼다는 그는 젊은이들에게 뿌리깊은 물신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자고 당부한다.

" 이상 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 운동을 펼쳐 나가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과 불행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면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는 열성을 보이는 집단은 두 부류이다. 하나는 함께 교회에 가자는 사람들이며 다른 하나는 '조중동'을 구독하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명절 때 만나는 친척에게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주지 말라고 설득하지 않으며, 식당 주인에게 '이 집 음식 맛은 괜찮은데 몰상식한 신문을 보시네요'라고 한마디 던지지 않는다. (…) 건강한 시민이라면 의지로 서로의 힘을 결집시켜야 하며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더 인간적인 사회가 아니라,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쉼 없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군가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가,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는 성찰을 주문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한걸음 씩 나아갈 때만이, 이 사회가 조금은 '덜 비인간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명수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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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amy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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